
한빛미디어 서평단 <나는리뷰어다> 활동을 위해서 책을 협찬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
클릭이 빗나갔다
신청 마감 직전, 다른 책을 누른 줄 알았다.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일러스트레이터 책이 도착해 있었다.
평소 디자인 도구를 직접 다룰 일이 거의 없는 사람으로서, 일러스트레이터에 대한 인상은 "펜 도구가 무서운 그 프로그램" 정도였다. 솔직히 처음 든 생각은 "이걸 어쩌지" 였다.
그래도 책장을 덮어 두지는 않았다. 책상에 놓고 며칠 노려보다가, 머릿속에서 세 개의 질문을 만들었다.
- 이 책에서 얻은 것이 Google이 발표한 DESIGN.md 작성에 적용될 수 있을까?
- 디자이너와 협업할 때, 내 시야가 한 뼘이라도 넓어질까?
- 개발 외 분야의 책 한 권을 통째로 읽고 나면, 내 생각의 폭이 정말 넓어질까?
세 질문 중 하나라도 "그렇다"가 나오면 충분히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. 그 느낌만으로 환불 대신 첫 페이지를 폈다. 잘못 받은 책에서 무엇이라도 가지고 나오겠다. 그게 시작이었다.
책이 다루는 범위 — 간단히
"맛있는 디자인" 시리즈답게 따라하기 중심이다.
작업 영역 → 도형과 패스 → 펜 도구 → 색·그라디언트 → 타이포그래피 → 레이어와 마스크 → 이펙트 → 심볼·라이브러리 → CC 2026 신기능(Generative 벡터, 자동 객체 분리) → 실전 프로젝트.
각 챕터가 개념 → 따라하기 → 결과물 미리보기 의 같은 박자로 돌아간다. 도구가 낯설어도 박자만 따라가면 길을 완전히 잃지는 않는다. 시리즈가 오래 살아남은 이유를 책 한 권 안에서 납득하게 된다.
솔직히, 다 읽고 나서도 잘 모르겠다
이건 책이 나빠서가 아니다. 내 베이스가 너무 얕아서다.
펜 도구로 곡선을 따라 그리는 단계에서는 머리는 이해되는데 손이 안 따라줬다. 외관(Appearance) 패널이 이펙트를 누적시키는 구조는 보고 잊고, 보고 잊었다.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시점에 머릿속에 남은 건 "일러스트레이터는 생각보다 훨씬 깊은 도구다" 정도의 추상적 인상이었다.
도구서는 손으로 반복해야 몸에 붙는다. 한 번 통독한 사람의 운명이다.
여기서 글이 끝났다면, 평범한 "비전공자가 디자인 책 한 권 읽어 봤다" 후기로 마무리됐을 것이다. 그런데 책을 덮고 며칠이 지나자, 처음에 던진 세 개의 질문이 차례로 돌아왔다.
그래서, 처음의 세 가지 질문은 어떻게 되었나
1) DESIGN.md에 적용할 수 있는가 — 의외로, 그렇다
마침 Google이 발표한 DESIGN.md(AI 코딩 에이전트에게 프로젝트의 설계 의도를 전달하는 문서 표준)를 직접 작성해 보던 중이었다. 빈 파일을 열어 두고 한참 멍하니 있었다. "어디부터 적지? 어느 위계로 묶지? AI가 잘 읽는 문서랑 사람이 잘 읽는 문서가 같은 모양일까?"
그때 며칠 전 덮은 일러스트레이터 책의 챕터들이 머릿속에서 다시 펼쳐졌다.
생각해 보면, DESIGN.md도 결국 시각 매체다. 사람과 AI가 함께 훑고, 패턴을 인식하고, 의도를 추출해 가야 하는 문서. 그 시각성을 결정하는 것은 새로운 무엇이 아니라, 이 책이 첫 100페이지 동안 반복해서 가르치는 가장 기초적인 디자인 원리들이다.
- 위계(Hierarchy) — #, ##, ###을 시각적 무게에 맞춰 일관되게 쓴다. 레이어 구조가 흐트러진 일러스트 파일이 사람을 혼란시키듯, 헤더 위계가 무너진 문서는 AI의 파싱과 사람의 스캔을 함께 잃는다.
- 정렬(Alignment) — 표·코드 블록·리스트의 들여쓰기를 끝까지 통일한다. 책에서 정렬 안 된 객체가 어수선해 보이는 것과 같은 이유다.
- 대비(Contrast) — **강조**, > 인용, `코드 `를 절제한다. 강조가 많아지면, 강조는 사라진다. 색을 너무 많이 쓰지 말라고 책이 반복하는 이유와 정확히 일치한다.
- 반복(Repetition) — 헤더 패턴, 표 컬럼 구성, 예시 포맷을 문서 안에서 끝까지 반복한다. AI 에이전트가 패턴을 학습하게 만드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다.
- 여백(White space) — 모든 줄을 채우지 않는다. 빈 줄은 의미 단위를 분리하는 도구다.
잘 정렬된 패스가 깔끔한 벡터 결과를 만들듯, 잘 정렬된 DESIGN.md가 깔끔한 코드 생성을 끌어낸다.
이 책의 메시지는 "일러스트레이터를 잘 쓰자" 였다. 내가 받은 메시지는 "AI 시대에는 문서도 디자인이다" 였다.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분명히 그렇다.
2) 디자이너와의 협업 — 내 시야는 한 뼘 넓어졌다
이 책을 읽기 전, 디자이너에게 자료를 받을 때 나는 "잘 만들어진 결과물" 만 봤다. 어떤 결정이 그 결과물을 만들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.
지금은 보이는 것들이 늘었다.
- 디자이너가 "벡터로 주세요" 라고 말하는 이유. 패스로 구성된 자산은 크기 변경에 깨지지 않고, 색과 획을 코드처럼 수정할 수 있다.
- 외관(Appearance) 패널의 누적 구조를 보고 나서야, 디자이너가 "한 객체에 이펙트를 쌓아 둔 거예요" 라고 말할 때 그게 무슨 뜻인지 안다.
- 심볼과 라이브러리 챕터를 통과하고 나서야, 디자인 시스템이 왜 코드의 컴포넌트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감각으로 이해된다.
협업에서 시야가 넓어진다는 건, 더 정확한 언어로 요청하고, 더 빠르게 의도를 알아차리는 일이다. 이 책 한 권으로 내가 디자인을 할 수 있게 되지는 않았다. 그러나 디자이너의 작업을 볼 줄은 알게 되었다.
이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. 다음 회의에서 같은 화면을 봐도, 우리는 더 적은 마찰로 이야기할 수 있다.
3) 생각의 폭 — 도구의 철학이 생각의 도구가 된다
마지막 질문이 가장 추상적이었다. "개발 외의 책을 통째로 읽으면 생각의 폭이 정말 넓어질까?"
답을 정리하자면, "넓어진다" 가 맞다. 다만 내가 기대한 방식은 아니었다.
이 책은 내게 새로운 지식을 주지 않았다. 대신 익숙한 문제를 다른 도구의 비유로 다시 보게 했다.
- 일러스트레이터의 레이어 는 코드의 모듈 경계와 닮았다. 레이어가 많아질수록 한 화면에 여러 의도가 섞이고, 모듈이 많아질수록 한 패키지에 여러 책임이 섞인다.
- 이펙트의 누적 은 데코레이터 패턴과 닮았다. 원본은 그대로 두고, 외관만 쌓는 구조다.
- 심볼과 라이브러리 는 디자인 시스템과 코드 컴포넌트의 공통 조상처럼 느껴진다.
이 책에서 새로운 지식을 얻지는 못했다. 그러나 이미 가지고 있던 지식을 다른 각도에서 다시 보게 됐고, 그 각도 변화가 곧 생각의 폭이었다.
개발이 아닌 책 한 권을 읽는다는 건, 결국 내 도메인 안의 문제를 다른 도메인의 언어로 다시 풀어 보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. 비유 하나가 생각 하나를 벌게 한다는 것을, 책장을 덮은 자리에서 배웠다.
이 책이 맞는 분, 안 맞는 분
- 맞는 분 — 일러스트레이터를 처음 잡는 입문자. CC 2026 신기능을 빠르게 훑고 싶은 실무자.
- 덜 맞는 분 — 디자인 이론 자체를 배우고 싶은 분. 이미 일러스트레이터를 능숙하게 다루는 분.
- 나 같은 비디자이너 개발자 — 한 번 통독하고 책장에 꽂아 두는 정도면 충분하다. 다만 그 한 번의 통독은 DESIGN.md를 쓰는 자리에서, 디자이너와 회의하는 자리에서, 다른 도메인의 어휘로 내 문제를 다시 보는 순간에 의외로 다시 펼쳐진다.
마무리
클릭이 빗나간 책이었다. 다 읽고도 일러스트레이터를 잘 다루게 되지는 않았다. 그것이 솔직한 결과다.
그러나 처음에 던진 세 개의 질문 — DESIGN.md, 디자이너와의 협업, 생각의 폭 — 은 한 권의 책이 책장을 덮고 난 뒤에 비로소 답해 주는 종류의 것이었다. 그리고 세 개 모두에 대해, 작더라도 분명한 "그렇다"를 받았다.
잘못 받은 책에서 무엇이라도 가지고 나오겠다 던 작은 약속은, 결국 내가 처음 기대한 것보다 조금 더 큰 형태로 돌아왔다. 책장 너머의 분야에 발을 한 번 들여놓는 일은, 그 자체로 보험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.
한줄 평: 클릭이 빗나간 책에서, 일러스트레이터 대신 더 넓은 시야를 얻었다.
'Books. > 2026년' 카테고리의 다른 글
| 이것이 Spring AI다 (0) | 2026.04.01 |
|---|---|
| 데이터 엔지니어링 디자인 패턴 (0) | 2026.03.05 |
| 마침내 특이점이 시작된다 (0) | 2026.02.27 |
| [제이펍 - 서평단 리뷰] LLM을 위한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(0) | 2026.02.12 |